司馬遷(사마천, BC 145?~BC 86?)
異名: 司马迁(SīmǎQiān), 자 자장
국적: 중국 전한
활동분야: 역사
출생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
주요저서: 사기(史記)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며《사기(史記)》의 저자이다. 무제의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집필하였고 기원전 91년《사기》를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사기(史記)》의 저자. 자 자장(子長).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으로 사마천이 7세 때 아버지가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된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구해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이 약 20세가 되던해 낭중(郎中:황제의 시종)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BC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BC 110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그후 2년이 지나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고 태산 봉선(封禪: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의식에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크게 견문을 넓혔고, 《사기》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원 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고, 그 유지를 받들어 BC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 황제인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BC 99년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宮刑: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기 완성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 전 91년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서한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서한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다. 이 편지《보임안서(報任安書)》의 내용으로 보아 사기는 이 시기(기원전 91년)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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