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賀 (이하, 790~816)

이하(李賀, 790~816)

異名: 李贺, Lǐ hè, 자 장길(長吉)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안문태수행, 소소소의 노래


이하(李賀, 791년 ~ 817년)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장길(長吉). 허난성 복창(福昌) 사람이며, 당나라 황실의 후예이며, 두보(杜甫)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집은 창곡(昌谷:河南省宜陽縣內)의 소지주였으며, 아버지는 변경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목표였던 진사시(進士試)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으로부터, 부친의 휘(諱)가 진숙(晉肅)인데 진(晉)과 진(進)은 동음(同音)이라 하여 그 휘를 범한다는 이의(異義)가 나와 단념하였다. 그 이듬해에 봉례랑(奉禮郞)이란 아주 낮은 직위에 2년간 근무하였을 뿐이며, 그것은 27세로 요절한 그의 일생에 영향을 끼쳐, 사상적 경향은 염세적 색채가 짙다.

李璡 (이진, Lǐ Jīn, 汝陽王)

李璡(이진, 汝陽王)

異名: 李璡(이진, Lǐ Jīn), 汝陽王(여양왕, Rǔyángwáng)


玄宗의 조카.

李延壽 (이연수, Lǐ Yánshòu)

李延壽(이연수)

李延寿(Lǐ Yánshòu)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李延年 (이연년, Lǐ Yánnián)

李延年(이연년)

李延年(Lǐ Yánnián)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협률도위(協律都尉:음악을 관장하는 벼슬)을 지냄.

李白 (LI Bai, 701-762)

Li Bai (李白)

Li Bai (Li Pai; Chinese: 李白; pinyin: Lǐ Bái; Wade–Giles: Li3 Pai2, 701 – 762), also known as Li Bo (Li Po; pinyin: Lǐ Bó; Wade–Giles: Li3 Po2), was one of the most acclaimed poets in the history of Chinese poetry. He and his friend Du Fu (712-770) are the two most prominent figures in the flourishing of Chinese poetry in the mid-Tang Dynasty that is often called the "Golden Age."

Li Bai was a prolific and creative poet who stretched the rules of versification of his time. Around a thousand poems attributed to him are extant today.[1] Li Bai's poetry has been much esteemed from his lifetime through the present day in the Chinese culture area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ld. Thirty-four of his poems are included in the canonical 18th century anthology Three Hundred Tang Poems.


Notes

[1]^ a b c d e Watson, 141


http://en.wikipedia.org/wiki/Li_Bai

李白 (이백, 701~762)

李白(이백, 701~762)

異名: 본명 이태백(李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자 태백(太白)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청평조사(淸平調詞)》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呂不韋 (여불위)

呂不韋(여불위)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는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승상이다.


생애

정치와 자본의 결탁

여불위는 조(趙)나라 출신의 거상으로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를 엄청난 돈과 상인다운 치밀함으로써 도왔다. 실례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영자초는 여불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의 지혜를 빌려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을 초나라 옷을 입고 만남으로써 부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진나라의 태후가 되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이때 공자 영자초에게 주었다. 당시 조희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며 그 아이가 바로 진시황제이다. 그 후 공자 영자초가 귀국하여 진나라의 왕의 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진나라의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진 장양왕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영정이 왕의 위에 오르자 상국이 되어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 후에 여불위는 태후 조씨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파면 당하고 음독자살하였다.

일자천금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전국의 식객들을 모아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그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하며, 이 글에 한자라도 더하거나 깎는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리하며 일자천금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여불위에 관한 주요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의 '여불위전'과 유향의 전국 그리고 설원(說苑)이 있다.


일화

그는 조나라에서 영자초를 보았을 때 기화가거(奇貨可居)란 말을 남겼다.


관련 작품

呂氏春秋(여씨춘추) |


http://ko.wikipedia.org/wiki/여불위

劉徹 (유철, BC 156~BC 87)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 156~BC 87)

異名: 刘彻(Liú Chè), 아명 체(彘), 자 통(通), 묘호 세종(世宗), 시호 효무황제(孝武皇帝)

국적: 중국 전한(前漢)

활동분야: 정치


중국 한(漢)의 제7대 황제로서 제후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한(漢)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劉知幾 (유지기, 661~721)

劉知幾(유지기, 661~721)

7세기 말 당나라 때의 역사학자. 고종·측천무후 등의 실록과《당서》등 수찬에 참여했다. 벼슬이 좌산기상시에 이르렀고, 거소현자에 봉해졌다. 저서《사통》은 중국 역사학사상 고전이다.


자 자현(子玄). 12세 때에 《좌전(左傳)》을 독파(讀破)한 수재로서, 17세 때까지 한 ·당(漢唐)의 정사(正史) ·실록을 거의 섭렵할 정도로 역사서에 능통하였다. 20세 때에 진사에 급제하고 수사국(修史局)에 들어가, 고종 ·측천무후 ·중종 ·예종 등의 실록과 《당서(唐書)》 《성족계록(姓族系錄)》 등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그뒤 벼슬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이르고 거소현자(居巢縣子)에 봉해졌다. 맏아들 황(貺)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 유형당한 뒤 죽었다. 저서인 《사통(史通)》은 중국 역사학사상 고전으로 귀중한 사료이다.


史通(사통)

陸游 (육유, 1125~1209)

陸游(육유)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1125~1209).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남송 제일의 시인으로, 금(金)나라가 남침했을 때 이민족에 대해 끝까지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한 철저한 항전주의자였다. 65세 때에 향리에 은퇴하여 농촌에 묻혀 지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약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 사상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며, 당시풍(唐詩風)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나라의 상황을 개탄한 시나 전원의 한적한 생활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글씨도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시집 검남시고(劍南詩稿)와 기행문 입촉기(入蜀記), 사서(史書) 남당서(南唐書) 등이 있다.


관련 한시

九月四日鷄未鳴起作(구월사일계미명기작) |


관련 한자어

大材小用(대재소용) | 靑天霹靂(청천벽력) |

韋應物 (위응물, Wéi Yīngwù, 737~804)

위응물 (韋應物, 737~804)

異名: 韦应物, Wéi Yīng wù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산시성[陝西省] 창안[長安]


좌사낭중(左司郞中), 쑤저우자사[蘇州刺史] 등을 역임했던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전원산림(田園山林)의 고요한 정취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당나라의 자연파시인의 대표자로 왕유(王維) 등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불렸다.

袁樞 (원추)

원추(袁樞, 1131-1205)

원추(袁樞, 1131-1205)의 자는 기중(機仲)이고, 남송의 건주(建州) 건안(建安, 현재의 복건) 사람이다. 효종 때 예부시에 응시하여 사부(詞賦)에 제1등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온주판관(溫州判官)으로 임명되었고, 후에는 예부시관(禮部試官)이 되었다.

건도(乾道) 9년(1173) 엄주교수(嚴州敎授)로 나갔는데, 이 직은 학관(學官)의 일종으로 경문(經文)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한가한 직무여서 여유있게 글을 쓸 수가 있어서 《통감기사본말》42권을 저술하였다.

뒤에 국사원(國史院)의 편수관으로 임명되어 국사전(國史傳)을 나누어 편찬하였고, 또 공부시랑겸국자제주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영종(寧宗) 때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 강릉지부(江陵知府)가 되었다. 개희(開禧) 원년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송사》〈원추전〉에는 “원추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평소 즐겨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한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사건별로 구별해 그 내용이 연결되도록 하고, 이것을 《통감기사본말》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원추는 《자치통감》을 즐겨 읽었고《자치통감》의 내용과 사마광의 사상적 관점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옛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고, 과감히 《자치통감》을 개편하였는데, 그가 창조정신이 풍부한 사학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通鑑記事本末(통감기사본말)

袁宏(원굉, 328~376)

袁宏(원굉, 328~376)

東晋(동진)의 학자.

文才(문재)는 있었지만 생활이 곤궁했던 원굉은 수송선의 인부노릇을 하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실력자의 눈에 띄어 동양군의 태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詩文(시문) 3백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삼국명신서찬」이다. 이것은 魏(위) 蜀(촉) 吳(오) 삼국의 건국공신 20명을 골라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칭찬하는 (찬․한구에 4자로 된 운문)을 짓고 거기에 서문을 붙인 것이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柳宗元 (유종원, 773~819)

柳宗元(유종원, 773~819)

異名: 柳宗元(LiǔZōngyuán), 자 자후(子厚) , 유하동(柳河東) ·유유주(柳柳州)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창안[長安]
주요저서: 《유하동집(柳河東集)》,《외집(外集)》,《보유(補遺)》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禹王 (우왕)

禹王(우왕)

사문명(姒文命), 禹王(Yǔ Wáng),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우(禹)는 성이 사(姒), 이름이 문명(文命)이며,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순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하왕조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8년간 재위하였으며 과로로 죽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100세까지 살다가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紹興縣> 경내)에 묻혔다고 한다.

于良史 (우량사, Yú Liángshǐ)

于良史(우량사)

于良史(Yú Liángshǐ)


생몰 연대가 확실치 않지만 당나라 현종(玄宗)·대종(代宗)·덕종(德宗) 때 활동하였던 시인이며, 관직은 시어사(侍御史)을 지냈다. 시를 잘 지어 자못 높은 명예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하는 작품은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7수뿐이다.


우량사 관련 한시

春山夜月(춘산야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