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준 [寇準, 961~1023]
異名: 寇准, Kòu Zhǔn, 자 평중, 시호 충민
국적: 중국 북송
활동분야: 정치·문학
출생지: 화저우 샤구이(현재 산시성)
주요저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
북송 초의 정치가 겸 시인. 거란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워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자 평중(平仲). 시호 충민(忠愍). 지금의 산시성[陝西省]인 화저우[華州] 샤구이[下邽] 출생. 979년(태평흥국 4) 진사에 급제, 대리평사(大理評事)·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염철판관(鹽鐵判官) 등을 역임하고, 태종(太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강직하였기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진종(眞宗) 즉위 후 중앙에 복귀하였으며, 1004년(경덕 1) 재상이 되어 거란(契丹)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그후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좌천되어 후난성[湖南省]인 헝저우[衡州]의 사마(司馬)로 있다가 죽었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구준 관련 한시
화산(華山)
歐陽修 (구양수, ōuyáng Xiū, 1007~1072)
歐陽修(구양수, 1007~1072)
이름: 欧阳修(ōuyáng Xiū), 호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학문, 예술
출생지: 장시성(江西省) 지안시(吉安市)인 길주(吉州) 여릉현(廬陵縣)
주요저서: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 겸 문인, 학자.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집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1030년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 범중엄(范仲淹)을 중심으로 한 새 관료파에 속하여 활약하였으나, 신종(神宗) 때 동향후배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저서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구양수
이름: 欧阳修(ōuyáng Xiū), 호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학문, 예술
출생지: 장시성(江西省) 지안시(吉安市)인 길주(吉州) 여릉현(廬陵縣)
주요저서: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 겸 문인, 학자.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집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1030년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 범중엄(范仲淹)을 중심으로 한 새 관료파에 속하여 활약하였으나, 신종(神宗) 때 동향후배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저서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구양수
歐陽脩 (Ouyang Xiu, 1007-1072)
Ouyang Xiu (1007-1072)
This is a Chinese name; the family name is Ouyang.
Ouyang Xiu (simplified Chinese: 欧阳修; traditional Chinese: 歐陽脩; pinyin: Ōuyáng Xiū; Wade–Giles: Ou-yang Hsiu) (1007 – September 22, 1072[1]) was a Chinese statesman, historian, essayist, calligrapher and poet of the Song Dynasty. He is also known by his courtesy name of Yongshu, and was also self nicknamed The Old Drunkard 醉翁, or Householder of the One of Six 六一居士[2] in his old age. Due to the multi-faceted nature of his talents, he would be regarded in Western parlance as a Renaissance man.[3]
Ouyang was one of the major players in the Qingli Reforms of the 1040s and was in charge of creating the New History of the Tang Dynasty. He was also regarded as one of the great masters of prose of the Tang and Song era. He was also a noted writer of both shi and ci poetry.
Poetry
Deep in Spring, the Rain's Passed (Picking Mulberries) [20]
Deep in spring, the rain's passed- West Lake is good.
A hundred grasses vie in beauty,
Confusion of butterflies, clamour of bees,
The clear day hurries the blossom to burst forth in the warmth.
Oars in lilies, a painted barge moving without haste.
I think I see a band of sprites-
Light reflected in the ripples,
The high wind carries music over the broad water.
採桑子
春深雨過西湖好,
百卉爭妍,
蝶亂蜂喧,
晴日催花暖欲然。
蘭橈晝舸悠悠去,
疑是神仙。
返照波間,
水闊風高颺管絃。
Notes
[1]^ 8th day of the 8th month of Xining 5 (熙寧五年八月八日), which corresponds to September 22, 1072 in the Julian calendar.
[2]^ He once explained to a guest that in his house he had 10,000 folios of books which he had collected, 1,000 scrolls of inscriptions dated as early as the Xia, Shang and Western Zhou, one Guqin, one chess set, and usually one pot of wine. When the guest said this was just one of five, he replied, I am an old man amongst these five; does that not make six? Liuyi Jushi Zhuan 414
[3]^ a b "Ouyang Xiu". The Anchor Book of Chinese Poetry Web Companion. Whittier College. 2004. Retrieved 2007-09-30.
[20]^ "Ouyang Xiu English Translations". 2007. Retrieved 2007-09-30.
http://en.wikipedia.org/wiki/歐陽脩
People: Ouyang Xiu (1007-1072)
China: Ouyang Xiu (歐陽脩, 1007-1072)
人物: 歐陽脩 (Ouyang Xiu, 1007-1072)
This is a Chinese name; the family name is Ouyang.
Ouyang Xiu (simplified Chinese: 欧阳修; traditional Chinese: 歐陽脩; pinyin: Ōuyáng Xiū; Wade–Giles: Ou-yang Hsiu) (1007 – September 22, 1072[1]) was a Chinese statesman, historian, essayist, calligrapher and poet of the Song Dynasty. He is also known by his courtesy name of Yongshu, and was also self nicknamed The Old Drunkard 醉翁, or Householder of the One of Six 六一居士[2] in his old age. Due to the multi-faceted nature of his talents, he would be regarded in Western parlance as a Renaissance man.[3]
Ouyang was one of the major players in the Qingli Reforms of the 1040s and was in charge of creating the New History of the Tang Dynasty. He was also regarded as one of the great masters of prose of the Tang and Song era. He was also a noted writer of both shi and ci poetry.
Poetry
Deep in Spring, the Rain's Passed (Picking Mulberries) [20]
Deep in spring, the rain's passed- West Lake is good.
A hundred grasses vie in beauty,
Confusion of butterflies, clamour of bees,
The clear day hurries the blossom to burst forth in the warmth.
Oars in lilies, a painted barge moving without haste.
I think I see a band of sprites-
Light reflected in the ripples,
The high wind carries music over the broad water.
採桑子
春深雨過西湖好,
百卉爭妍,
蝶亂蜂喧,
晴日催花暖欲然。
蘭橈晝舸悠悠去,
疑是神仙。
返照波間,
水闊風高颺管絃。
Notes
[1]^ 8th day of the 8th month of Xining 5 (熙寧五年八月八日), which corresponds to September 22, 1072 in the Julian calendar.
[2]^ He once explained to a guest that in his house he had 10,000 folios of books which he had collected, 1,000 scrolls of inscriptions dated as early as the Xia, Shang and Western Zhou, one Guqin, one chess set, and usually one pot of wine. When the guest said this was just one of five, he replied, I am an old man amongst these five; does that not make six? Liuyi Jushi Zhuan 414
[3]^ a b "Ouyang Xiu". The Anchor Book of Chinese Poetry Web Companion. Whittier College. 2004. Retrieved 2007-09-30.
[20]^ "Ouyang Xiu English Translations". 2007. Retrieved 2007-09-30.
http://en.wikipedia.org/wiki/歐陽脩
People: Ouyang Xiu (1007-1072)
China: Ouyang Xiu (歐陽脩, 1007-1072)
人物: 歐陽脩 (Ouyang Xiu, 1007-1072)
管仲 (관중, ?~BC 645)
管仲(관중, ?~BC 645)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형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저서로 알려진 《管子(관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요 작품
管子(관자)
관련 한자어
管鮑之交(관포지교)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 자 | 중 |
| 본명 | 관이오 |
| 국적 | 중국 |
| 활동분야 | 정치, 행정 |
| 출생지 | 중국 허난성 잉수이 |
| 주요저서 | 管子(관자) |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환공의 형인 규(糾)의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진언(進言)으로 환공에게 기용되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었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저서로 알려진 《管子(관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요 작품
管子(관자)
관련 한자어
管鮑之交(관포지교)
Location:
Henan, China
郭子儀 (곽자의, Guō Zǐyí, 697~781)
郭子儀(곽자의, 697~781)
異名: 郭子仪(Guō Zǐyí)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군사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武將).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했고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창안과 뤄양을 수복했다. 토번(티베트)이 창안을 치려 하자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렀다.
異名: 郭子仪(Guō Zǐyí)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군사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武將).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했고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창안과 뤄양을 수복했다. 토번(티베트)이 창안을 치려 하자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렀다.
郭璞 (곽박, Guō Pú, 276~324)
郭璞(곽박, 276~324)
異名: 郭璞(Guō Pú), 자 경순(景純)
국적: 중국 진(晋)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문희(聞喜:山西省)
주요작품: 《유선시(遊仙詩)》 《강부(江賦)》등
중국 진나라의 시인 겸 학자. 유곤(劉琨:越石)과 더불어 서진(西晋) 말기부터 동진(東晋)에 걸친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시에는 노장(老莊)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으며, 《유선시(遊仙詩)》 14수가 특히 유명하다. 부(賦)에서는 《강부(江賦)》가 널리 알려져 있다.
자 경순(景純). 문희(聞喜:山西省) 사람. 원제(元帝:司馬睿) 때 저작좌랑(著作佐郞)과 상서랑(尙書郞)을 역임하였으며, 나중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왕돈(王敦)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는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대하였다가 살해당하였다. 유곤(劉琨:越石)과 더불어 서진(西晋) 말기부터 동진(東晋)에 걸친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시에는 노장(老莊)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으며, 《유선시(遊仙詩)》 14수가 특히 유명하다. 부(賦)에서는 《강부(江賦)》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방언(方言)》 《초사(楚辭)》 등에 주(註)를 달았다.
異名: 郭璞(Guō Pú), 자 경순(景純)
국적: 중국 진(晋)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문희(聞喜:山西省)
주요작품: 《유선시(遊仙詩)》 《강부(江賦)》등
중국 진나라의 시인 겸 학자. 유곤(劉琨:越石)과 더불어 서진(西晋) 말기부터 동진(東晋)에 걸친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시에는 노장(老莊)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으며, 《유선시(遊仙詩)》 14수가 특히 유명하다. 부(賦)에서는 《강부(江賦)》가 널리 알려져 있다.
자 경순(景純). 문희(聞喜:山西省) 사람. 원제(元帝:司馬睿) 때 저작좌랑(著作佐郞)과 상서랑(尙書郞)을 역임하였으며, 나중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왕돈(王敦)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는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대하였다가 살해당하였다. 유곤(劉琨:越石)과 더불어 서진(西晋) 말기부터 동진(東晋)에 걸친 시풍(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시에는 노장(老莊)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으며, 《유선시(遊仙詩)》 14수가 특히 유명하다. 부(賦)에서는 《강부(江賦)》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방언(方言)》 《초사(楚辭)》 등에 주(註)를 달았다.
顧況 (고황, Gù Kuàng, 727~816)
顧況(고황, 727~816)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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