屈原 (굴원)

굴원(屈原, BC 343?~BC 278?)

異名: 본명 굴평, 자는 원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문학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사(漁父辭)》등이 있다.


초나라에서 굴(屈)과 소(昭), 경(景)이라는 성은 귀족이었다. 특히, 굴(屈)은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다. 이름 평(平), 자 원이다.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부여받았다. 당시 회왕은 그를 극히 중시하여 궁정 내의 법령 초안을 책임지고 항시 국가 기밀에 참여케 하고, 궁정 밖에서는 법령의 선포를 책임지고 외빈을 접대케 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출세하자 일부 대신들은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사기 (史記)에 의하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이 굴원의 재능을 시기하여, 그가 법령 초안할 때 그의 초고를 훔쳐 자신의 공인양 내세웠다. 굴원이 양보하려 들지 않자, 그는 회왕의 면전에서 굴원을 헐뜯었다. 게다가 굴원이 항상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며 초나라에 자신이 없으면 법령을 초안할 사람이 없다고 자랑한다며 그를 모함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그 후로는 점차 굴원을 멀리하였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는 바로 전국 말년으로 크고 작은 많은 제후국이 오랫동안 서로 합병하여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진(秦) 등 일곱 나라 만 남게 되었다. 그중 진나라가 가장 강했고 제·초가 그 다음이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세력을 확대하여 천하를 통일코자 했다. 굴원은 높은 식견을 가진 정치가로 당시 형세를 익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분산되어 진에게 각각 격파되어 망국의 위험을 불러오기 쉽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타인의 음모로 국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없었다. 당시 진나라는 초나라 내부에 간신이 득세함을 보고 초를 침략코자 초나라와 제나라 연맹을 깨뜨릴 방법을 강구했다. 진왕은 유명한 참모 장의(張儀)를 초에 파견하여 이간책을 진행시켰다. 연횡파(連衡派)인 장의는 방법을 강구해 회왕이 총애하는 기녀 정수(鄭袖)를 매수하고 또 상관대부 근상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하여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하게끔 종용하고, 제와 단교하면 상(商)의 토지 6백 리를 그 보상으로 초에게 줄 것이라 말했다. 회왕은 진의 보상을 탐내 장의의 조건에 응했다.

그러나 실상 제나라와 절교한 뒤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채하며 당시 주기로 했던 것은 6리이지 600리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초 회왕은 속은 것을 깨닫고 화를 못 이겨 즉각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히려 진나라 군사에게 대패하고 도망쳐 왔다. 게다가 한중(漢中) 일대의 땅마저 잃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초 회왕은 더욱 화가 나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진을 공격했으나, 결국 남전(藍田) 일대에서 포위되어 또 한차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된다. 이쯤 되자 회왕은 비로소 굴원의 재능을 아쉬워하여, 그의 힘을 빌어 열세를 모면해 보고자 했다. 굴원을 재등용하여 제나라로 파견시켜 다시 국교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진은, 초나라와 제나라 두 대국이 다시 연합할까 두려워 한중 일대의 토지 반을 반납하는 대가로 화해를 청했다. 회왕은 장의를 미워하여 땅을 얻을 생각은 않고 장의의 사죄만을 요구했다. 장의는 초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스스로 진왕에게 그를 초나라로 보내 사죄케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중 일대의 토지를 반환할 필요가 없게 되자 진왕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초왕의 조건을 받아들여 장의를 초나라로 보냈다. 장의는 초나라 수도에 도착한 뒤 급히 수단을 써서 회왕의 충신 근상과 기녀 정수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이 두 사람이 그를 위해 직접 좋은 말을 하게끔 했다. 결국 초회왕은 또 다시 장의를 풀어 주었다.

굴원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어찌하여 한중 일대의 땅도 마다하고 또 영토 대신으로 초나라에 온 장의도 죽이지 않았는지를 묻자, 초왕은 그제서야 깨닫고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장의는 이미 저 멀리 국경을 떠나 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 후 진나라는 또 초나라에 유인책을 펼쳐 결연 관계를 맺자고 청하곤 대신 초나라 태자를 秦의 인질로 보내도록 했다. 이로써 초나라와 제나라의 수교는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굴원은 줄곧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고 주장해 왔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실의는 굴원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풍부한 감정과 탁월한 재능으로 시가 창작에 몰두하였다.

굴원이 비분과 우울 속에 끊임없이 시를 쓰던 이 기간에, 진초 양국의 관계에는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진나라 인질로 들어가라는 명을 받은 초나라 태자는 진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몰래 도망쳐서 귀국했다. 진나라는 이를 구실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회왕은 또 굴원을 불러들여 그에게 태자와 함께 제로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 다시 제와 연합해 진에 대항코자 했다. 그러자 이듬해 진은 다시 강화를 가장하여 진에서 담판을 짓자고 했다.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경솔히 진나라에 들어가, 결국 구금되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였다. 이후 제나라 인질로 들어간 초나라 태자는 즉각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경양왕(頃襄王)이다.

그리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이때 굴원은 나라의 멸망 이미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고 상심했다. 얼마 안 있어 진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하여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는 초나라 수도 영성(郢城)을 함락시켰다. 경양왕은 하는 수 없이 진성(陳城)으로 천도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으로 「애영」(哀郢)이라는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비분과 고통을 담아 내었다. 그 뒤 나라는 날로 엉망이 되었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유랑에 떠도는 백성들의 고초를 바라보며 실제로도 결국 큰 돌멩이를 껴안은 채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62세였다. 후세 사람들은 나라와 세상을 걱정했던 위대한 시인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투신 자살한 날(음력 5月5日)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이날 주악(糉子)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배불리 먹은 뒤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이런 민간의 풍속으로 볼 때 굴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굴원의 문학적 공헌으로는 탁월한 창작을 통해 감동적인 애국 사상을 전파하고, 초사체(楚辭體)라는 새로운 시형을 창조한 것을 들 수 있다. 굴원 이전에는 4자가 한 구를 이루는 시경체(詩經體)가 유행했는데, 그는 남방 언어를 이용하여 시경 이래 유행했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혜’(兮)자 혹은 ‘사’(些)자로 두 개의 3자구를 연결시키어서 후세의 7언시와 유사한 7언구를 만들었다. 형식의 변화로 내용 역시 더욱 다양해지고, 생활의 필요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형의 대변혁은 전국 말엽과 양한 시대의 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 경차(景差) 당륵(唐勒) 등은 물론 훗날 한초(漢初)의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포(王褒) 왕일(王逸) 등도 그의 문체를 모방하였다. 이 중 도서정리 전문가였던 유향은 많은 사람들의 작품과 굴원이 남긴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는데 이것을 초사 (楚辭)라 한다. 이는 중국 고대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권의 총집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두가지는 시경 과 소명문선 (昭明文選)임)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시경 이후 등장한 명작을 망라하여, 중국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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