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壽(진수, 233~297)
異名: 陈寿(Chén Shòu), 자(字) 승조(承祚)
출생지: 중국 쓰촨성[四川省] 난충[南充]
국적: 중국 촉한(蜀漢)~서진(西晋)
활동분야: 역사학
주요저서: 삼국지(三國志)
중국 서진(西晋)의 역사가로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하였다.
자(字)는 승조(承祚)이며, 촉한(蜀漢, 221~263)의 파서군(巴西郡) 안한(安漢, 지금의 四川省 南充) 출신이다. 촉한(蜀漢)의 장수(將帥) 진식(陳式)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다. 초주(譙周, 201~270)를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으며, 촉한(蜀漢)에서 관각령사(觀閣令史)의 벼슬에 올랐다. 하지만 후주(後主) 유선(劉禪, 재위 223~263) 시기에 권세를 누리던 환관(宦官) 황호(黃皓)에게 거스르다 쫓겨났다.
촉한(蜀漢)이 멸망한 뒤, 진수(陳壽)는 서진(西晋, 265~316)에서 사공(司空) 장화(張華, 232~300)에게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다시 관직(官職)에 올라 저작랑(著作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무제(武帝, 재위 265~290)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익주(益州, 지금의 四川盆地와 漢中盆地 일대)의 역사인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이나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문집(文集)인 <제갈량집(諸葛亮集)>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위(魏), 촉(蜀), 오(吳) 삼국(三國)의 역사를 깊이 탐구하여 기전체(紀傳體)의 <삼국지(三國志)> 65편(篇)을 완성하였다. <삼국지>는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당대에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던 하후담(夏侯湛, 243~291)은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 감탄하며 자신이 저술한 <위서(魏書)>를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장화(張華)도 진(晋) 역사의 편찬도 진수에게 맡겨야 할 것이라며 감탄하였다. 결국 <삼국지>는 진수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이지만, 무제(武帝)의 뒤를 이은 혜제(恵帝, 재위 290~306) 때에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사(正史)로 인정되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사료(史料)들을 매우 엄격하게 선별하여 다루었으며, 문장도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치, 경제 등의 사실만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과 관련된 인물들이나 주변의 국가나 민족들과 관련된 사실들도 폭넓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위(魏)의 선양(禪讓)을 받아 세워진 서진(西晋)에서 벼슬을 했기 때문에 위(魏)를 정통(正統)으로 해서 <삼국지>를 서술하였다. 하지만 위(魏)를 정통으로 한 다른 사서(史書)들은 <위서(魏書)> 등의 제목 아래 촉한(蜀漢)과 오(呉)의 역사를 다루었지만, 진수는 제목도 <삼국지>로 하고, 본문도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呉書)’로 나누어 삼국(三國)을 상대적으로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진수(陳壽)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의 관직까지 올랐지만, 모친(母親)이 뤄양[洛陽]에서 죽자 유언(遺言)에 따라 그 곳에 장례를 치렀다가 불효자(不孝子)라는 비난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故鄕)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당시의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다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의 직위를 제수(除授) 받았지만, 명(命)을 따르지 못하고 죽었다.
<진서(晉書)>에는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하면서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怨恨)으로 제갈량(諸葛亮)과 그의 아들인 제갈첨(諸葛瞻, 227~263)을 폄하했다거나, 위(魏)의 문인(文人)이었던 정의(丁儀, ?~220)의 후손들에게 그의 전기(傳記)를 쓰는 대신에 대가를 요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후대에는 촉한전통론(蜀漢正統論)이 강조되면서 촉한(蜀漢)의 신하였다가 서진(西晋)에서 다시 벼슬을 했으며 위(魏)를 정통으로 역사를 서술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진수(陳壽)는 제갈량(諸葛亮)의 정치가로서의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촉한(蜀漢)에 대해서는 용어의 사용 등에서 오히려 우호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정의(丁儀)도 위(魏) 문제(文帝, 220~226) 조비(曹丕)에게 주살(誅殺)되어 후손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면서 <진서(晉書)>의 기록은 비판을 받고 있다.
주요저서
삼국지(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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