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總 (강총, Jiāng Zǒng, 519∼594)

江總(강총, 519∼594)

이름: 江总(Jiāng Zǒng)


진(陳) 나라 후주(后主) 때 사람. ≪진서(陳書)ㆍ강총전(江總傳)≫에 의하면 강총은 학문을 좋아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오언과 칠언에 특히 뛰어났다.

글씨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써서, 이것을 궁중에서 본받아 써서 궁체가 나왔다.

또한 10구체의 <규원(閨怨)>과 같이 칠언율시에 근접한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진서, 陳書, 진서:강총전, 陳書:江總傳

賈誼 (가의, Jiǎ Yì, BC 200~BC 168)

가의(賈誼, BC 200~BC 168)

異名: 贾谊(Jiǎ Yì)
국적: 전한(前漢)
활동분야: 정치 ·문인 ·학자
출생지: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최연소 박사가 된 중국 전한 문제 때의 문인 겸 학자. 진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했다.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좌천되자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해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다.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아 약관으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과진론(過秦論)'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

新書(신서)

賈幼隣 (가유린, Gǔ Yòulín, 718~772)

賈幼隣(가유린, 718~772)

이름: 본명 가유린(賈幼隣, 贾幼邻, Gǔ Yòulín), 가지(賈至, 贾至, Jiǎ Zhì)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예술
출생지: 중국 뤄양
주요저서: 문집 30권


당나라의 문신 겸 시인.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 30권을 남겼다.

江淹 (JIANG Yan, 444-505)


Jiang Yan (江淹, 444-505)

Jiang Yan(江淹) was a poet and cifu writer in the Southern Dynasty of China, who occupie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the Southern Dynasty literature.

Jiang Yan says that he loves strange yet differences, which has relations with the admiration and pursuit of new and strange social trends and literary habits. This character also affects his making friends and writing style.


http://en.wikipedia.org/wiki/Jiang_Yan

江淹 (강엄, Jiāng Yān, 444~505)

江淹(강엄, 444~505)

이름: 江淹(Jiāng Yān), 자 문통(文通), 예릉후(醴陵侯)
국적: 남조(南朝)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허난성[河南省] 카오청[考城]
주요수상: 예릉후(醴陵侯)


중국 남조(南朝)시대의 문인. 유(儒) ·불(佛) ·도(道)에 통달했고 문학활동은 송 ·제 시대에 주로 했다. 부(賦)에는 한부(恨賦) ·별부(別賦) 2편이 있는데, 문사(文辭)가 화려하다.

賈島 (JIA Dao, 779-843)


賈島 (Jia Dao, 779-843)

Jia Dao (traditional Chinese: 賈島; simplified Chinese: 贾岛; pinyin: Jiǎ Dǎo; Wade-Giles: Chia Tao) (779–843), courtesy name Langxian (浪先), was a Chinese poet active during the Tang Dynasty. He was born near modern Beijing; after a period as a Buddhist monk, he went to Chang'an. He became one of Han Yu's disciples, but failed the jinshi exam several times. He wrote both discursive gushi and lyric jintishi. His works were criticised as "thin" by Su Shi, and some other commentators have considered them limited and artificial.

According to Dr. James J.Y. Liu (1926–1986), a professor of Chinese and comparative literature, Jia’s poem The Swordsman "seems...to sum up the spirit of knight errantry in four lines." The Swordsman is as follows:

For ten years I have been polishing this sword;
Its frosty edge has never been put to the test.
Now I am holding it and showing it to you, sir:
Is there anyone suffering from injustice?


http://en.wikipedia.org/wiki/Jia_Dao

賈島 (가도, 777~841)

賈島(777~841)

가도, 贾岛, Gǔdǎo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 자는 낭선(浪仙). 하북(河北) 범양 사람. 처음에 출가(出家)하여 법호를 무본(無本)이라 하였다가 후(後)에 한유와 가까이 사귀게 되어 환속(還俗)하였다. '조숙 지변수 승고 월하문(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란 구절의 퇴고(推敲)에 관(關)한 일화는 유명(有名)하다.

姜夔 (JIANG Kui, 1155-1221)


JIANG Kui (1155-1221)

Jiāng Kuí (Chinese: 姜夔) (c. 1155 – c. 1221) was a famous Chinese poet, composer and calligrapher of the Song Dynasty, particularly famed for his ci (song lyric poetry). He composed numerous poems, including the famous "He Bei Lai" and the more well known "San Wan Yue."


http://en.wikipedia.org/wiki/Jiang_Kui

姜夔 (강기, Jiāng Kuí, 1155~1221)

姜夔(강기, 1155~1221)

異名: 姜夔(Jiāng Kuí), 백석도인, 자 요장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요주 번양(지금의 장시성에 속함)
주요저서: 《백석도인시집》 《백석도인가곡》
주요작품: 〈양주만〉〈영롱사범〉


중국 남송 때의 시인이자 사인(詞人). 사(詞)에는 〈양주만(揚慢)〉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았다. 시에는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등의 칠언절구를 지어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그밖에 시 이론에도 밝았다.


자는 요장(堯章)이며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고도 불린다. 요주(饒州) 번양(지금의 江西省에 속함) 출신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漢陽)에서 살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양주(揚州)·강회(江淮)·상주(湘州)·악주(鄂州)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0세 때 시인 소덕조(蕭德藻)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후 강기는 소덕조에 의지하면서 호주(湖州:지금의 折江省에 속함)에 정착하였다.

강기는 다재다능하여 시사(詩詞) 이외에 서예에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음률에도 정통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는 운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문명(文名)을 널리 떨쳤으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고 만년에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살면서 궁색한 생활을 하였다.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서 친구였던 장라(張羅)가 주선하여 겨우 전당문(錢塘門) 밖에 안장할 수 있었다.

사(詞)에는 〈양주만(揚州慢)〉 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은 〈영롱사범(玲瓏四犯)〉 〈탐춘만(探春慢)〉 등이 있다. 강기의 사는 "성당(盛唐)의 이백과 두보와 같다"거나 "사인 중의 두보"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창작태도는 매우 엄정하고 근명하였으며, 예술적 조탁과 연마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강기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나중에는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아 일가를 이루었다.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 〈호상우거잡영(湖上寓居雜詠)〉 등의 칠언절구는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인데, 시구의 조탁이 정묘하고 시상이 그윽하며 운격이 청명하다.

시 이론에도 밝아 《백석도인시설(白石道人詩說)》에서는 선배들의 창작 경험을 흡수하고 자신의 창작이론도 수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백석도인시집(白石道人詩集)》 《백석도인가곡(白石道人歌曲)》 《백석시사집(白石詩詞集)》 등이 있으며, 시 180여 수와 사 80여 수가 남아 전한다.